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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당 소개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곳

금성당(錦城堂)과 금성대군(錦城大君)
금성당(錦城堂)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사후 금성왕신(錦城王神)으로 신격화되어 주신(主神) 모셔진 무속 신당(神堂)이다. 금성대왕의 정충대절(貞忠大節)은 마치 일월(日月)과 같이 빛을 다투고 충의(忠義)에 탁월(卓越)함은 만인(萬人)으로 하여금 추앙(推仰)케 되었으며 거룩한 사상과 정신의 사실(事實) 또한 국사(國史)에 나타나고 혁혁(赫赫)히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조명되어져 금성왕신(錦城王神)으로 등극되어진 것이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은 1426년 5월 5일[음력 3월 28일] 태어나 1457년 11월 7일[음력 10월 21일]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조선 제4대 국왕 세종대왕(世宗大王, 1418∼1450)과 소헌황후(昭憲王后) 심씨(沈氏) 사이의 8남 2녀 중 여섯째아들로 태어났는데,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어릴 적 이름은 유(瑜)이 다. 타고한 천성이 강직했으며 어릴 적부터 충의정신이 남달랐고 성장하여서는 문장가로써 명성도 얻었다. 보효정신 또한 각별하여 자신의 양육을 맡았던 조선 제3대 국왕 태종(太宗, 1401∼1418) 이방원(李芳遠) 후궁 의빈(懿嬪) 권씨(權氏)씨가 훗날 늙고 병들자 자신의 집으로 옮겨 병 치료를 조치하였다.
금성대군의 부친 세종대왕은 의리와 충성심이 강했던 금성대군을 총애하였다. 세종대왕은 왕비와 함께 가끔씩 금성대군 집에 거처하거나 이어하기도 하면서 아들을 극진하게 대했다. 금성대군이 14살 때인 1440년 6월 두창(痘瘡)에 걸려 심히 위독하였을 때에는 세종대왕이 깊이 염려하여 영추문(迎秋門)을 열어 놓고 밤새도록 닫지 아니하면서 병세를 묻는 것이 길에 이어 끊어지지 아니할 정도였다. 금성대군(錦城大君)으로 봉해진 것은 8살이던 1433년(세종 15년) 1월 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 1436년(세종 18년) 4월에 그의 다섯째 형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와 함께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학습하였다. 12살 때 되던 해인 1437년(세종 19년) 2월, 문신(文臣)이었던 경절공(敬節公) 최사강(崔士康)의 딸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전주(全州) 최씨(崔氏)와 결혼하였다. 같은 해 6월, 세종의 명에 따라 후손이 없었던 조선 제1대 국왕 태조(太祖, 1335∼1457) 이성계(李成桂)의 8남 의안대군(宜安大君, 1382∼1398) 방석(芳碩)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출계(出系)하였다.
금성대군은 자신의 맏형인 문종의 장남 단종(端宗, 1452∼1455)이 조선 제6대 국왕 즉위하자 곧바로 지지를 표명 하였다. 단종은 어느 날 금성대군과 함께 수양대군을 사정전(思政殿)으로 불러 친히 물품을 하사하고 좌우에서 보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스스로 영의정에 오른 수양대군은 정권탈취의 야심을 갖고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단종의 보필대신 김종서 등을 제거하면서 아랫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을 반역죄로 몰아 아들과 함께 강화도로 안치한 후 사사(賜死)하였다. 이어 수양대군은 단종 1년인 1453년에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사건 속에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의 행위에 반대하면서 적극적으로 단종을 보호하였다. 그러자 수양대군은 모략을 세워 1455년(단종 2년) 1월 금성대군을 탄핵하여 고신(高紳)을 박탈하고 유배령을 내렸지만 무죄로 판결되었다. 이 후, 수양대군은 단종 3년인 1455년 금성대군이 반란을 꾀하였다는 이유로 왕자 신분을 박탈하고 삭령(朔寧, 지금의 경기도 연천)으로 귀양을 보냈다. 자신의 반대 세력을 축출한 수양대군은 드디어 1455년 조선 제7대왕 세조대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금성대군의 귀양지는 경기도 광주(廣州)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유배지 광주에서도 단종복위 주장을 그치지 않았다. 금성대군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된 사육신 사건이 일어난 후 경상도 순흥(順興)으로 옮겨져 위리안치(圍籬安置)가 되었다. 금성대군은 순흥에서도 비밀리에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위한 거병과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밀의를 엿들은 경상도 안동(安東)의 관노 이동(李同)이 모반(謀反)을 밀고하였다. 세조 3년(1457년) 가을, 금성대군의 거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자손까지도 종친록(宗親錄)과 유부록(附錄錄)에서 삭제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금성대군은 같은 해 7월 17일 안동으로 옮겨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관군의 습격을 받은 순흥 고을은 온통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屠戮)을 당하여 폐부(廢府)되기에 이르렀다. 안동으로 옮겨진 금성대군은 줄곧 사사를 종용받다가 다시 전라도 지역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457년(세조 3년) 10월 21일 그의 나이 32세에 사사되었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강봉은 1681년(숙종 7)에 이르러 신원(伸寃)되어 다시 대군(大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1506년∼1544년)에 이르러 금성대군 증손 이의가 왕에게 청을 올려 금성대군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를 옳게 여긴 중종이 1519년 금성대군 자손 3대에게 관작을 봉하고 승습(承襲)의 명을 내렸다. 이때 아들 이맹한은 1519년(중종 14년)에 특명으로 함종군(咸種君)에 추증되고 손자 이연장(李連長)은 동평군(東平君)에 봉작되었다. 이후, 금성대군의 관작이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肅宗, 1674∼1720)에 이르러 복구되었다. 순흥에 부(府) 또한 다시 설치되었다.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正祖, 1777∼1800)는 금성대군이 사망한 지 334년이 지난 1791년(정조 15년)에 내각과 홍문관에 명하여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비롯한 공사 문적을 면밀히 고증하여 단종을 위해 충성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토록 하였다. 이때, 단종을 위해 세조와 맞서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 이유를 비롯한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이용,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 하령군(河寧君) 이양(李穰) 등 여섯 명의 종친이 육종영(六宗英)에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영조 연간에는 안평대군을 비롯한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등의 공덕을 칭송하여 시호(諡號)를 내렸다. 금성대군의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후속 조치로 각종 추념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백미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단종이 묻혀 있는 장릉(莊陵)의 배식단(配食壇)에 배향된 것이다. 이로써 육종영은 국가적 추숭 대상자로 여겨지고 금성대군은 영월 창절사(彰節祠), 영주 성인단(成仁壇), 괴산 향사(鄕祠)에 제향 되기에 이르렀다.
금성대군이 주신으로 모셔진 금성당은 애초 무속신당(巫俗神堂)으로 지어진 1800년대 후반의 건축물이다. 150여년 전후쯤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조선 시대 궁중에서 후원하여 건립된 무속신당 중 오늘날까지 본디의 터에 옛모습 그대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당이다. 대지 총면적은 1,296㎡[392평)]이며 본당 49.84㎡[약 15평]과 본당으로부터 연결되어진 하당 41.09㎡[약 13평] 그리고 본당 오른편에 있는 살림채[안채] 77.44㎡[약 24평] 등 3동이 연결 되어진 목조와가 단층이다. 본당과 하당으로 이루어진 신당은 “ㄷ자형”의 건물이 “ㄱ자형”의 살림집과 신당 앞의 마당을 공유하며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놓여 있다. 본당은 정면 4칸에 측면 한 칸 반이며, 서쪽 마지막 칸에서 남쪽 방향으로 붙여서 정면과 측면 각각 1칸인 하당을 지은 “ㄱ자형”을 띤다. 상당의 전체적 양식은 납도리 홑처마에 합각(合閣)지붕이고 연접된 하당은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상당은 잘 다듬어진 2단의 장대석 기단으로 되어 있어 금성당 전체 건물군에서 가장 높은 위계를 나타낸다. 장대석 기단 위에는 사다리형 초석을 놓고 다시 그 위에 방형의 기둥을 세웠다. 정면에는 접을 수 있는 4짝의 세살사분합문을 달았고 일부 창호는 접어 올려 위로 고정시킬 수 있는 들어열개 사분합문(四分閤門)이 설치되었다.
금성당 주신으로 모셔진 금성대군이 본격적으로 신격화 되어진 시기는 1765년(영조 41년) 2월 나라에서 금성대군을 봉사하는 혈손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한 후 부터이다. 정조 15년인 1791년에 이르러서는 금성대군이 국가적 추증(追贈) 대상자로 여겨지고 그의 봉사손들 또한 등용하게 되자 민중 신앙 속에서도 본격적으로 추모되었다. 서울∙경기지역 무속에서는 왕신으로 등극되어져 널리 신앙되면서 구파발(진관동)을 비롯한 노들(망원동)과 각심절(월계동) 등 세 곳에 금성당이 건립되게 되었다.
1970년대 접어 들면서 산업화 물결이 밀려오고 도심개발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노들과 각실점의 금성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구파발의 금성당은 개발제한구역 내에 있었던 터라 사멸위기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또 다시 은평뉴타운 조성이 수립되자 철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고비를 넘기고 살아 남게 되었다. 복원과정을 거쳐서 2008년 7월 22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58호 지정된 후, 2016년 5월 25일 샤머니즘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금성당은 조선시대에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신앙처로 지어졌다. 그래서 국가에서 호국사찰을 지명한 것과 같이, 궁중 후원으로 세워진 져 때가 되고 시가되면 궁에서 궁인을 보내 나라의 태평성대와 국태민안의 기복을 빌곤 하였다. 특히, 명성황후(明成皇后)는 병술년(고종23년, 1886)을 비롯한 정해년(고종 24년, 1887) 등 14차례 걸쳐 1,106냥을 금성당에 시주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궁중발기(宮中發記))나 (셔진관금성당인등시쥬책(西津寬錦城堂引燈施主冊))자료 등에서 증명하고 하듯이, 궁에서 주요하게 여겼던 신당 중 하나였다.
금성당 본당(本堂)에는 금성대군이 네 명의 말구종(驅從)이 끄는 말을 타고 활을 쏘며 행차하는 모습의 신도(神圖)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금성대군 신도좌우와 하당(下堂)에 여타의 무신(巫神)들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나라의 시화연풍과 무사태평은 물론 대동 일동의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축원하는 당굿이 열렸다. 일 년 내내 수많은 기자(祈子)들이 수시로 왕래하여 물고를 받아 갔으며, 족보있는 큰만신들이 찾아와 경사굿, 재수굿, 성주굿 등을 하였다. 이말산에 묻힌 궁인들의 천도굿도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서울지역 유명 악사 및 만신들이 새제자들에게 음악과 굿문서를 전수시키기도 하였다.

자료발췌 : 양종승, “금성당 및 금성대군 신격화에 대한 무속학적 고찰” (금성대군 충의제 학술대회) 은평구 · 샤머니즘박물관 2016